재봉틀의 역사

초기의 재봉틀은 재봉틀이 재봉틀로서 
형태를 갖추는 1800년 이전의 시대와 
1800년 이후의 시대로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초기, 섬유와 섬유를 잇기 위해서는 
바늘과 실이라는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 중의 하나였습니다. 
바늘의 경우에는 동물의 뼈·구리·은 등의 
금속을 이용하였고, 실은 여러 가지의 
섬유재질을 사용하였습니다. 
이들 중 바늘의 공통된 특징은 길게 만든 
바늘의 한쪽은 침처럼 뾰족하고, 
또 다른 쪽은 실을 걸어 지속적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한 구멍이 있습니다. 
 
그리고 섬유 등을 사용하는 용품은
좀 더 실용적이고 효율적 작업을 위해 
바늘의 점진적 개량화가 되었습니다. 
이후 17세기경부터 영국인·독일인 등이 
바느질에 대신할 기계의 제작을 시도, 
실패를 거듭하다가 
1790년 토마스 세인트가 특허를 얻고, 
봉제기기의 여러 모습으로 변화되어 
점차 현대적인 재봉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아이디어는 지속적으로 나오고
보다 나은 봉제기기를 만들어 내고자 하는 
인간의 필요성에 의해 발전되었습니다. 
그리고 18세기 영국의 산업혁명과 더불어 
발전되고 발명되기를 거듭합니다. 
초창기 재봉틀의 발전 면모를 보면 
18세기의 집약적 기술의 발전을 토대로 
19세기에 들어서면 많은 발전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기계화된 재봉틀의 등장은 대량 
생산방식의 봉제 산업을 확대 발전시켰고 
인간의 생활환경 뿐 아니라 문화・예술의 
창의적이고 창조적인 부분에서의 
선도적 역할과 긍정적 기능은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재봉틀 역사

우리나라는 1938년 최초로 외국 재봉틀을 
도입하여 이용해오다가 1950년대 후반 
자체개발에 착수하여 1966년 
최초의 국산품이 생산되었습니다. 
이때의 상품은 중요 품목을 수입하여 
조립해서 만들던 시기로 보여집니다.

오늘날 기계·전기·전자기술의 급속한 
발달에 힘입어 품질이 국제수준으로 
향상되어 아프리카·중동·미주지역으로 
수출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가정용 재봉틀의 다양한 기능을
가정용재봉틀에 접목하여 
고기능화함으로써 보급이 날로 증가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2012년에는 Singer의 
160주년을 한국에서 기념행사를 했습니다.

이러한 국내 재봉틀의 품질향상으로 
1991년까지 기술열세에 의해 만성적인 
무역수지 적자에 허덕였던 재봉틀 산업이
 1992년 이후 내년 8000만 달러 이상의 
수출과 5000만 달러 이상의 흑자를 이루는 
효자산업으로 바뀌었습니다. 
 
국내 재봉틀의 보급 현황을 시대별로 보면, 
의복의 기성복화가 정착되기 전단계인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손재봉틀과 발재봉틀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현재 리조재봉틀박물관에 전시된 전시품 중 
1962년의 대우 드레스재봉틀이 
자랑스럽게 느껴집니다.

리조재봉틀박물관에 전시된 
여러 나라의 과거 즉, 그때 그 당시 시대적 
사실인 기계적 내용과 미적 내용만을 
말하고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기계적 효율성은 다른 형태의 
기계에서 밝혀졌을 뿐 아니라 당시의 
필요에 의한 개발과 발명을 통하여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만족감과 
가능성의 무한 창조적 효용성은 
생산성과 수익의 면에서는 이미 많은 
통계에서 밝혀진 바 있습니다. 
산업혁명이 이를 증명합니다.

이제는 모든 산업에서와 같이, 
그리고 과거의 많은 실패와 어려움을 딛고 
기계적 효용성·미적 발현감을 통해 현재를 
만들었듯이 오늘 뿐 아니라 내일을 위해 
우리 모두 다시한번 시작하면 어떨까요.